남명 조식 선생 관련 낭송詩

시

남명 조식 선생 관련 낭송詩

포랜컬쳐 0 60
8a4ffbc780d762c591dbf82ed563a3ca_1792035338_68.jpg
 

[제1편]
우복동의 벼루

              박선해

칼집이 새벽등을 베고서 문을 연다
쇳소리 찬 이슬을 깨물어 날을 세워
먹빛은 벼룻돌까지
깊숙이 밴다

숯불이 쇠의 귀를 달구며 밤을 깨워
망치가 불티마다 붉은 점 찍어 놓네
쇳덩이 제 속살까지
두드려 깬다

붓끝이 먹물 속을 헤치며 벼랑 긋고
벼루는 검은 파문 품어서 획을 낳네
먹방울 종이 귀퉁이
칼끝을 세워

대숲이 서릿발을 받아서 등을 펴고
댓잎은 찬 달빛을 저미어 칼집 짓네
찬 기운 마디 사이로
날카로이 선다

처마가 낙숫물을 세어서 돌을 뚫고
돌계단 닳은 무릎 감추며 문턱 받네
발자국 천 번 지나도
홈 하나 남네

등잔이 심지 끝을 태우며 방을 낮춰
재 한 줌 불씨 곁에 엎드려 새벽 품네
꺼진 줄 알았던 불씨
재 밑에 산다

칼날이 마지막엔 칼집을 벗어 놓고
제 얼굴 비춘 자리 서늘한 빛만 남네
베어 낼 적은 밖 아닌
칼 쥔 손이다



*우복동벼루: 남명조식의 산실이자 공간





[제2편]
아! 남명이시여 

                  박선해

강학의 자취 깊어 산천을 거닐면서
도의 뜻을 굳히니 백성의 등불 되어
바람의 변주곡으로 천년을 밝혔도다

벼슬길 물리치고 초야에 몸을 두어
말보다 행실로서 참됨을 먼저 보이니
글 아껴 남겼더라도 삶이 곧 경전이네

의(義)자 하나 가슴에 칼처럼 새기고
사사로운 정 끊어 공의를 세우시니
한 몸의 바름만으로 세상의 축을 잡네

제자들 떠나는 길 말없이 배웅하며
옳거든 주저 말고 앞으로 가라 하니
침묵한 그 가르침이 길이 되어 남았네

난세의 먹구름 속 굽힘을 모른 절개
불의 앞에 선 그 모습 산보다 높으니
묵언은 저항이 되어 바른 역사 세웠네

고요한 새벽마다 학문 길 닦으시니
하늘과 땅을 품어 큰 기개를 세우고
큰 뜻은 한 번 뿌려도 만세에 전해지네

충절 기상 드높아 불의에도 굽히잖는
그 맑은 정신이여! 오늘의 우리 삶에
길잡이 되어주구나, 세세토록 빛나리

강호에 기득한 풍월 고요 머금고
큰 도의 울음소리 바람결에 스미니
그 얼이 살아있다네, 세세연년 영원토록






[제3편]
근본으로 가는 길. 남명정신 


                       박선해


1.
한 몸을 곧게 세워 천지의 뜻 따르니
작은 이익 쫓지 말고 큰 근본 지켜가자
참 마음 길러내어선 세상 밝혀 하노라

2.
거짓말 멀리하고 호연지기 키우소서
남풍에도 굳은 절개 푸른 솔 본받아
믿음은 변하지 않는 마음 사람의 길 닦으리

3.
말보다 먼저 걸음으로 도를 증명하며
글 한 줄 남기기보다 삶으로 가르쳐
행함이 곧 배움이니 스스로를 묻도다

4.
비바람 몰아쳐도 중심 먼저 세우고
남의 허물 캐기보다 내 마음 살피며
하루를 반듯이 살면 도는 이미 여기

5.
권세와 야욕에도 굽히지 않는 선비
속세의 헛된 욕심 비우고 비우면서
참다운 마음 얻으니 근원에 기쁨 있네

6.
정신의 뿌리 찾아 오늘도 길 떠나니
골짜기 맑은 샘물 구름 위 흐르듯이
남명의 큰 뜻 따라서 우리 삶 발밝혀 가리. 






[제4편]
남명의 길에서

            박선해

사랑은 붙잡는 일이 아니라
등을 보며 끝까지 서 있는 일임을
남명은 알고 있었다

떠나는 제자에게 말을 아끼고
눈빛 하나 건네던 사람
그 침묵이 수백 권의 글보다
더 오래 남았다

강물은 등을 보이고 흘러가도
산은 한 번도 등을 돌리지 않는다
그가 가르친 믿음은 사람을 묶지 않고
길을 세워 주는 일이었다

배웅이란 눈물의 일이 아니라
네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끝까지 의심하지 않는 것
그 단단한 신뢰 하나로
등짐이 가벼워지는 순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랑은 함께 가자 말하지 않고
먼저 가라 말해주는 용기
돌아오지 않아도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어주는 마음

그래서 남명의 사랑은 늘 뒤에 있었다
앞서 걷는 사람의 그림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바람을 대신 맞는 자리

오늘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끝내 남아 있던 자세
세상이 등을 돌려도
사람의 등을 믿어 주던
그 오래된 배웅 때문이다






[제5편]
마르지 않는 우물


                              박선해

뜰 아래 우물 하나 먼 하늘 길어 올려
두레박 빈 배 속에 푸른 말 담아 온다
한 모금 목을 적시자
묵은 내가 깨어나

돌 틈새 물길 하나 깊은 데 몸을 숨겨
긴 가뭄 목이 타도 찬 기운 놓지 않네
손 넣어 바닥을 찾자
더 먼 곳이 출렁여

두 손에 물을 받아 얼굴을 씻어내니
주름마다 젖은 소리 오래도록 번져온다
길어낸 것은 물인데
내 안에서 샘 솟네

마른 대지 깊은 곳에 숨어 우는 목소리
퍼내어도 채워지는 저 푸른 눈물방울
하늘과 땅을 잇는
맑은 숨결 이어져

아득한 시간 너머 한 줄기로 흐르는 물
메마른 가슴마다 생명의 불씨 지펴
가만히 귀 기울이면
태초의 소리 들려

채워도 비워지는 저 비움의 신비 속에
끝없이 솟아나는 생명의 온기 품어
오늘도 마르지 않게
너를 향해 흐르네

물결에 비쳐 오는 그리운 얼굴 하나
오랜 세월 기다려온 눈부신 아침처럼
내 안의 깊은 바다가
고요하게 깨어 나








[제6편]
산해정

   박선해


뜰 한쪽 묵은 저울 빈 접시 들어 올려
기왓골 빗물 한 줌 처마 끝 달아본다
댓바람 추를 옮기며
무게 없는 뜻 잰다

돌계단 이끼 벗어 선비 발 불러내고
툇기둥 어깨 세워 휜 세월 바로잡네
한 생을 저울에 얹자
바늘 끝이 떨린다

빈 뜨락 해를 달아 어느 쪽 기우는가
낡은 집 저울 되어 오는 이 달아본다
나설 때 가벼운 것은
몸이 아닌 나였다

흐르는 맑은 물에 씻어낸 욕심인 듯
툇마루 걸터앉아 부서진 햇살 받네
속 비워 채워지는 데
그늘 까지 고요하다

천 년의 벼루 먹은 깊은 산 속 숨결이
마당을 쓸 듯이 부드러운 바람 되어
조용히 옷깃을 적셔
마음 마저 쓸어낸다

처마 끝 풍경 소리 허공에 매달리고
세상의 시린 무게 저만치 밀려나네
두 손을 무릎에 모아
세월 속을 굽어본다

돌 틈에 돋아난 풀 이슬을 품에 안고
지나간 옛 자취를 말없이 속삭이네
위로에시린 마음 조차
소멸되는 들꽃 하나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은 그 자리에
조용히 스며드는 맑고 깊은 향기처럼
오늘도 묵은 저울은
사람을 재고 있다.







[제7편]
곧음의 안쪽


                        박선해

제1연
댓가지 눈발 하나 등에다 세워 두고
산등성 모진 삭풍 옷깃을 베어 가네
휘어진 마디 끝에도
하늘은 곧다


제2연
시린 눈 감아 내린 대숲의 푸른 숨결
속으로 쌓이는 멍 아프게 여미면서
세상을 받쳐 든 힘은
결기 어린 곧음이라


제3연
샘물은 별 한 채를 밑바닥 가둬 두고
두레박 빈 갈비로 어둠을 길어 내네
퍼내도 더 깊어지는
저 깊은 우물 속


제4연
고요한 물결 위로 떠도는 찬란한 빛
메마른 가슴마다 생기를 부어 넣고
바닥을 비워 낸 자리에
하늘 하나 품어 안네

제5연
매화는 언 흙속에 향기의 뼈를 묻고
꽃눈은 제 몸 먼저 깨뜨려 봄을 여네
천하를 세우려던 발
제 그림자 밟고서네

제6연
모진 추위 견뎌낸 아픔의 깊이만큼
가지 끝 터져 나와 세상을 적시는 빛
생명을 틔워 올리는
고결한 그 뜻이여

제7연
굽이쳐 흐르는 길 눈보라 헤쳐 나와
비로소 마주하는 곧음의 그 안쪽엔
스스로 낮아진 마음
영원토록 피어나네.




[제8편]
초록 바다의 섬

             박선해

눈을 들어 올리자
초록이 먼저 수평선을 펼친다

숲은 제 몸을 눕혀
물이 되는 연습을 오래 해 왔는지
잎맥마다 번져 나온 숨결이
바람의 결을 따라 천천히 출렁인다

대지는 깊은 잠 속에서도
푸른 피를 멈추지 않았고
그 맥박 위를
수천 갈래 초록이 낮은 파도처럼 건너간다

문득 초록의 한가운데 작은 섬 셋이 떠 있다
누군가 흘린 씨앗이 오랜 침묵 끝에
제 이름을 얻은 듯

서로에게 닿지 않으면서도 같은 물결을 품고
같은 바람을 견디며 같은 시간을 건너왔다

바람은 잎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초록의 깊이를 뒤척이고
햇살은 빛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숨은 상처를 천천히 익혀 낸다

그래서 깊음은 아래로 가라앉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없이 무너진 날들을
푸른 결로 되살려 내는 일

나는 그 섬들을 바라보다가
한 사람의 삶도 저렇듯 제 안에 작은 섬 하나 품고
세상의 파도를 견디는 것임을 알았다

끝내 살아남는 것은 높이 솟은 나무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서로의 뿌리를 붙들고
오늘도 말없이
초록 한 바다를 밀어 올리는 것들이다.







[제9편]
먼저 건네는 사람

            박선해 

 비를 머금은 흙길 위로
 나직한 발걸음이 내려앉는다
 젖어 드는 발자국마다
 작은 물결이 번져 가고
 스며든 수분은 이내
 꽃무늬처럼 조용히 피어난다
 지나온 먼 길을 돌아보면
 언제나 헤아리기 바빴던 시간들
 누군가의 뒤에 서는 것이 두려워
 조바심으로 내딛던 걸음이었다
 누가 앞서 가고 있는지
 누가 뒤따라오고 있는지
 그 고단한 숫자를 세며
 저마다의 거리를 재어 보며
 나는 수많은 계절을 살아왔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과의 사이에
 높은 벽을 쌓아 두었던 날들
 그러나 어느 맑은 날
 낮게 스치는 햇살 사이로
 작고 낮은 담장 아래를 보았다
 그곳에는 이름조차 모르는
 수줍은 들꽃 한 줄기가
 가만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낯선 바람이 불어오자
 도망치거나 피하지 않고
 들꽃은 먼저 바람을 받아
부드럽게 몸을 흔들었다
그 작고 순순한 흔들림은
거친 조용함을 깨뜨렸고
오래도록 굳어 있던
내 마음의 틈새를 두드렸다
단단히 닫혀 있던 마음의 문도
비로소 삐걱거리며
그 흔들림의 결을 따라
조용히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세상을 움직이고 바꾸는 것이
도드라진 큰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
다정한 눈빛으로
먼저 웃어 주는 따스한 얼굴 하나
서두르지 않고
먼저 기다려 주는 서툰 걸음 하나
그 온기들이 모여
얼어붙은 세상을 녹이고 있었다
그날 들꽃 앞에 서서
나는 누군가를 일으켜 세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 안에 갇혀 있던
굳고 모난 계절 하나를
비로소 조용히 지나오고 있었다







[제10편]
칼집의 안쪽

        박선해

찬 가마 흙 한 줌이 제 모서릴 깎아내고
뜨거운 가슴속엔 검은 불길 일으킨다
시련의 오랜 시간에
몸을 깎아 세운다

불길은 굽은 등을 밤새도록 곧게 편다
망치질 소리마다 슬픔 하나 터져 나오고
재 아래 잠긴 쇳소리
속뼈부터 벼린다

천왕봉 먹구름이 산천재를 눌러와도
기울어진 세상 향해 가슴 하나 바르게 펴
벼루는 검은 혀로
덕천 물을 갈아 쓴다

지필묵 펼쳐 놓은 벼랑 끝의 시퍼런 날
먹향에 적신 마음 은하수를 뿜어내어
한 획을 세워 놓으니
산의 허리 곧아진다

차가운 도포 자락 차오르는 서기(曙氣) 속에
불의와 타협 않는 서리 내려 시퍼러니
품 속에 간직한 날은
마음부터 베어낸다

세월의 풍파 아래 세한을 견뎌내며
칼끝은 녹이 슬어 흙의 아래 잠들어도
선비가 남긴 온기
칼집 안에 살아있다

그 굳은 절개 있어 가슴마다 꽃이 피고
칼집에 남은 자국 천년 밖을 겨누니
지키고자 했던 뜻은
부러지지 않음이라

육신은 흙이 되어 바람 따라 떠나도
선비는 떠난 뒤에 참된 길을 밝혀주니
주인 잃은 세월 속도
빈 칼집이 날을 세운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