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근의 라이프 스토리 * 창식이형 (38) - 김치전 한 장

수필, 소설

임상근의 라이프 스토리 * 창식이형 (38) - 김치전 한 장

포랜컬쳐 0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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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근 작가

창식이 형(38) (김치전 한 장)

입춘이 지났기에, 달력 한 장 넘기듯 계절도 슬며시 바뀌었으려니 했다. 
그러나 바람은 아직 겨울의 칼날을 쥐고 있었다. 
골목을 휘돌아 들어온 바람이 가슴을 파고들어, 
독감에 오래 움츠렸던 몸을 마구 할퀴고 지나갔다. 
봄은 왔다는데 살결은 여전히 한겨울이다.
이런 날이면 공연히 속이 허하다. 
김치전이나 한 장 붙여 농주 한 사발 기울이고 싶다. 
마당 한켠 땅속에 묻어 둔 김장김치 단지를 떠올린다. 
장독 뚜껑을 열면 올라오던 시큼하고 깊은 김치냄새, 
겨울을 통째로 삭혀낸 시간의 향기. 
한껏 맛이 든 김치를 꺼내어 숭숭 썰고, 
물오징어를 곱게 다져 넣어 반죽에 섞는다. 
지글지글 기름 소리 따라 전이 익어가면, 
가장자리가 먼저 바삭해진다. 
막걸리 한 잔 가득 따라 들고, 
금방 붙여낸 김치전 한 장에 젓가락을 댄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손은 옛날 방식 그대로 움직였는데, 맛은 어딘가 비어 있다. 
김치가 덜 익은 것도 아니고, 
오징어가 모자란 것도 아닌데, 그 시절 그 맛이 아니다.
창식이 형!
김장 김치전 맛이 변했나 봐요. 
아니면 내 배가 불러서, 세상맛에 길들여져 그 소박한 김치전 맛을 밀어내는 건가요.
어린 날 이쯤이면 부엌에서 어머니가 부침개를 붙였다. 
우리는 어른들 틈에 끼어 한 조각 얻어먹으려고 눈치를 보았다. 
갓 부친 전을 호호 불어가며 베어 물던 그 맛. 그것은 단지 김치와 밀가루의 맛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손놀림과, 형의 웃음소리와, 방 안 가득하던 사람 냄새가 함께 빚어낸 맛이었다.
세월은 김치처럼 익어간다지만, 어떤 기억은 너무 오래 묻어 두면 변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우리는 가난했으나 행복했다. 배는 고팠으되 정은 언제나 넉넉했다. 
지금은 배는 부른데, 마음 한구석이 헛헛하다. 그래서일까. 
김치전 한 장 앞에 두고도 자꾸만 사람을 찾게 된다.
형과 마주 앉아 한잔 나누면, 그 맛이 다시 살아날까요. 
막걸리 사발 부딪치며 
“그래, 잘 왔어요” 
한마디 건네면, 김치전은 다시 그 시절 빛깔을 찾을까요. 
음식은 혀로 먹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는 얼굴로 완성된다는 걸, 나이 들어서야 알 것 같습니다.
입춘이 지났어도 바람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그러나 형을 보고 싶은 마음은 그 바람보다 더 매섭게 가슴을 파고듭니다. 
아마도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김치전 맛이 아니라, 
형과 어머니와 한자리에 둘러앉았던 그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봄이 완연해지기 전에, 형. 우리 한번 만나 김치전 붙여 먹읍시다. 
땅속 김치독에서 막 건져 올린 김치처럼, 오래 묻어 둔 이야기들도 함께 꺼내 봐요 우리. 
그날은 분명, 이 김치전 맛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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