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 있는 하루 * 허들링 * 박덕은 수필가편

수필, 소설

수필이 있는 하루 * 허들링 * 박덕은 수필가편

포랜컬쳐 0 218
c8bb7fea7900ac545a2aa076e47af122_1766780832_56.jpg
박덕은 문학박사 
· 문학평론가

허들링

                  박덕은(문학박사 · 화가 · 전 전남대 교수)


눈보라 속에서 황제펭귄들이 한데 모여 허들링(Huddling)을 하고 있다. 허들링은 몸을 녹인 안쪽의 펭귄이 밖으로 나가면, 바깥쪽에서 추위에 떠는 펭귄이 안으로 들어와 추위를 이겨내는 방법이다. 황제펭귄들은 서로의 몸을 밀착해 겹겹의 동그라미를 만들고 있다. 저 겹겹의 동그라미는 영하 50도의 추위를 무너뜨리고 시속 140㎞의 강풍을 흩어지게 한다. 눈보라와 겨울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겹겹의 동그라미가 펭귄의 안녕을 먹여살린다. 황제펭귄의 발등에는 갓 태어난 펭귄 알이 얹혀 있고 움찔움찔 자라는 소리가 있고 즐거운 상상으로 내일을 끌어당기는 고요가 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의 몸에서 너의 몸으로 체온을 옮기며 천천히 자리바꿈을 하고 있는 저 황제펭귄들.

그녀도 생활고라는 강추위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황제펭귄처럼 자신의 온기를 이웃과 나누고 있다. SNS를 통해 알게 된 그녀는 어느 날, 내가 지도하고 있는 문학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문학회에 나와 수업을 받았다. 오전에는 마트에서 오후에는 식당에서 일을 하며 늦은 밤 퇴근길을 쪼개어 가로등 밑에서 시를 썼다. 한 달에 한 번은 매번 봉사 활동을 했다. 나의 눈길을 잡아끈 건 그녀의 나눔정신이었다. 그녀의 봉사와 나눔에는 울컥과 뭉클이 살고 있었다. 생활고와 몇몇의 불안과 우울이 그녀와 함께 지내고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갔다. 남극의 추위 같은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그녀는 봉사활동 현장에서 농도 100%의 온기로 밀착하며 마음의 허들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때때로 사는 게 힘들어 폭삭 늙어버리고 싶다며 나에게 넋두리를 쏟아놓기도 했다. 폭삭 늙으면 아픔도 폭삭 늙어 슬픔의 기력이 없어질 거라고 했다. 그렇게 신세한탄을 하다 가도 봉사활동 일정이 있으면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한번은 그녀가 영정 사진 촬영 봉사를 위해 어느 마을회관에 갔다. 입구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겹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매서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꽃은 허들링을 하듯 겹겹으로 꽃잎의 몸을 밀착해 피어 있었다. 그녀는 사진 촬영할 할머니의 입술에 청춘의 말투 같은 분홍 립스틱을 발라주었다. 립스틱은 할머니의 청춘 시절을 관통했는지 입술이 온통 연분홍으로 물들었다. 깊숙이 밀봉된 젊음과 한때의 설렘이 흘러나와 할머니의 입꼬리를 올라가게 했다. 이쁜 옷까지 입은 할머니는 기분이 좋아 이런 말을 했다.

“새색시처럼 시집가는 기분이 들어. 자식도 잘 찾아오지 않는데 이렇게 봉사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립스틱도 발라주고 사진까지 찍어줘서 기분이 좋아. 오래 살길 잘했어.”

할머니의 그 말에 그녀는 피로가 싹 사라지고 사는 힘을 다시 얻었다.

눈보라는 다시 불어닥치고 황제펭귄은 발등에 놓인 펭귄 알을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겹겹의 동그라미를 만들며 허들링을 하고 있다. 그녀의 뭉클과 울컥 같은 걸음으로 황제펭귄은 느릿느릿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겹동백꽃의 꽃잎 같은 몸으로 그녀의 나눔정신 같은 사랑으로 황제펭귄은 안으로 안으로 다시 밖으로 밖으로 따스한 동그라미를 그리며 추위를 이겨내고 있다. 생활고 같은 눈보라와 강추위는 내일도 계속 불어오겠지만 그녀의 마음 나눔 같은 허들링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황제펭귄의 발등에 보금자리를 튼 펭귄 알에서 눈밭을 걷는 뒤뚱뒤뚱과 꼼지락거리는 호기심이 자라 어느 날, 알을 깨고 나올 것이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