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명호 작가의 수필 산책 * 한 여름의 밤
포랜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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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7 23:39

하명호 수필가
한여름의 밤
松淸하명호
때 늦은 한여름 보리 타작 철, 마을은 땀과 먼지, 그리고 사람들의 부산한 기척으로 가득 찼다. 비수를 찌르는 듯 날카로운 보리 까끄래이는 옷속 깊숙이 파고들어 등줄기를 긁었고, 응달 진 사타구니를 사정없이 연약한 내 살을 물어 뜯어 파고 들어 온다. 더위 먹은 양 탈곡기도 헐떡거려 돌아가는 소리에 혓바닥 길게 내밀어 땅바닥에다 패다기치듯 하고서는 개들도 짖기를 포기했다.
집안에 종내기들, 그러니까 머슴아 사내아이들은 아침 수저 놓기가 무섭게 사라졌다.“소먹이러 간다요!” 짧게 외친 뒤 뮈가 그리도 바쁜 지 바쁜 척 하며서는 아직 구이에 쇠죽도 다 못 먹인 소를 억지로 끌고서는 동구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 준비성 있어 한 녀석은 이미 전날 밤부터 준비를 마쳐두었다. 모기 잡는 모닥불이 꺼진 뒤, 사그러지는 불씨 사이로 모닥불 깊숙한 곳에 햇감자 몇 알과 강냉이 한 줌을 묻어두고 간 것이었다.“내 밥 굶을까봐서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하던 그 아이는 어른들 눈에는 천연덕스러워도, 자기만의 생존 전략을 품은 작고 야무진 농군이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면 마당에 쌓인 보리더미가 하나둘 줄어들고, 어느덧 볕이 기우는 시각이 되면 여자 아이들이 슬며시 골목 끝으로 모여든다.수건 하나 어깨에다 들추고서, 누비치마 툭 걸치고, 땀에 젖은 속옷 끌어안고 개울가로 나가는 것이다. 하루의 먼지를 개울물에 털어내려는 마음들이 고요하게 흐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개울이었다. 계곡 속에 흐르는 물이라 냉기를 품어 게다가 남녀는 분명히 구분돼 있었다. 윗목은 여자들, 아랫목은 남정네들. 그런데 개울 아래 바위틈마다 시커먼 거머리가 들끓었고,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 하고서는, 물결을 타고 슬그머니 사람 살갗에 달라붙었다. 종아리, 허벅지, 심지어는 여자들 그 중요한 곳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작년 겨울, 앞집 금주년이 그 화를 당한 이후, 마을에는 거머리 대책이 하나둘 생겨났다. 가장 많이 알려진 방어법은 놋수저였다."놋수저 빛만 봐도 거머리가 기절헌다"는 말이 떠돌자, 여자아이들은 수건 아래 허리춤에 수저 하나씩 끼우고 개울에 들어갔다. 속으로는 웃음이 나와도, 혹시나가 역시나가 아니 길 겁이 더 컸다. 그런데 놋수저 만큼이나 떠돌던 민간요법도 하나 있었다.“여쿨대잎이랑 야생쑥 짓이겨서 거시기에 후벼 넣으면, 거머리가 가까이 못 온다.”
그 말을 믿은 아이들은 개울가 가는 길목에서 여쿨대를 꺾고, 길가 주변에서 야생쑥을 찾아 잎사귀를 빻았다. 바위에다 문질러 즙을 내고, 그것을 속옷 사이에 끼우거나 아예 그곳 안쪽에 살짝 넣는 아이도 있었다. 처음엔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쑥 냄새는 났지만, 거머리는 그걸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안 듣는디야…”
“놋수저가 최고여, 놋수저로 막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야혀.”
그렇게 여자아이들의 방어법은 점점 간소화되었고, ‘집안에 멀쩡한 놋수저 자루 똑 부러져 없어지는 것도 이즈음이라 놋숟가락 하나면 족하다’는 게 그 여름의 교훈이 되었다. 개울가에서는 바위 위에 수건이 널리고, 물장구 소리와 함께 해맑은 웃음이 터졌다. 바람결에 감자 타는 냄새도 실려 왔다. 멀찌감치 나무 그늘에 누운 소년은 강냉이를 꺼내 십으며, 개울 건너편을 힐끔 바라봤다. 서로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여름은 그렇게 서로의 거리에서 무르익어갔다.
그 시절, 그 여름은 땀과 까끄래이, 놋수저, 그리고 여쿨대 냄새까지 어우러진, 사람 냄새 나는 계절이었다. 여치 풀 벌레 소리 들리어 오는데 배가 불러 외양간에 드러누워 되새김질 윗이 아랫이 마주치며 늙은 이 집에 식구 암소 두 눈 지긋이 감고서 오늘 따라 내 뿜는 방귀 소리 요란하여 한 여름의 밤은 깊어만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