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랜컬쳐 이 달의 칼럼 * 참 선비의 길을 새기며 - 허남철

수필, 소설

포랜컬쳐 이 달의 칼럼 * 참 선비의 길을 새기며 - 허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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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철 산해정인성문화진흥회 회장


참 선비의 길을 새기며


                            허 남철

 

정승 세 분이 배출되었다는 삼정동. 가로수를 따라 초등학교와 중학교 사이에 소담스럽게 조성된 활천동 도심속 오솔길 입구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동상이 있다. ()의 위엄을 갖추고 의()를 꼿꼿하게 세우고 오가는 인초(人草)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 내심 후학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천상의 황홀함도 잊은 체 오백 년을 훌쩍 뛰어넘어 오솔길 모퉁이로 환생했으리라. 오솔길을 걸으며 잠시 참 선비의 길을 걸으신 남명 조식 선생과 그의 애제자인 내암 정인홍 선생의 삶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본다.

 

남명 선생은 평생을 정치로부터 한발 물러나 경()과 의()를 숭상하며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지리·의학·병학 등 잡학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실천적 학문관이라 할 수 있는 학문과 실천을 결합한 '반궁실천(反躬實踐)'을 강조하며 후학양성을 통해 참 선비의 길을 걸으셨다.

 

남명 선생에 대한 에피소드는 차고 넘친다. 그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선생은 어린 아들 차산을 묻은 산해정 뒷산인 조차산에 올랐다. 가끔 답답할 때 산책 삼아 오르곤 하셨다. 그날은 산 정상에서 도달하여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그의 시선은 이미 녹산 앞바다를 떠나, 망망대해를 지긋이 넘어 대마도를 향했다. 당시에는 대기가 맑아 대마도 그 이상도 시야에 꽉 들어찼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대마도에 머물 겨를도 없이 갑자기 악귀처럼 사악한 먹구름이 용트림하듯 기괴한 형상을 하며 그 방향이 부산을 향해 달려오는 듯했다고 한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선생은 머지않아 나라에 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대비책을 강구 할 것을 조정에 요구하였다. 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율곡 이이보다 훨씬 앞선 예견이었다. 하지만 조정에서 선뜻 그의 예견을 받아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선생은 실망할 여유도 없었다. 선생은 단순히 예견이나 주장에 그치지 않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익히도록 하였다.

 

당시 문()과 무()의 구별이 뚜렷한 시절임에도 선생은 제자들에게 문무(文武)를 함께 익히게 하여 훗날 도탄에 빠질 나라의 안위를 지키게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진 곽재우를 비롯한 정인홍, 김면 등 임진왜란 당시에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의병장들을 배출하였다. 이는 실천적 학문과 애국심을 강조한 남명 학파를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필자가 어릴 때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공부를 독려하며 이놈들아, 배워서 남 주냐? 부지런히 공부해라.”라며 당신들의 못 배운 설움을 자식들을 통해 풀려고 했었다. 하지만 남명의 실천적 학문은 배워서 남 주는 작업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일신의 출세와 안위를 넘어 학문을 통해 세상에 이로움을 전파하는 것이 실천적 학문이다. 배워서 실용화하지 않는 학문은 의미가 없다. 실천적 학문은 17세기에 실용학파의 디딤돌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남명은 직접적으로 정치노선에 몸을 싣지는 않았지만, 명종이 단성 현감으로 임명했을 때, 사직 상소에서 "궁중의 과부와 어린 임금이 나라를 이끌 수 없다."며 친인척의 정치참여에 대한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 비판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 모를 리 없는 남명은 그렇게 참 선비의 길을 걸었다.

 

올바른 비판을 통해 위정자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었다. 비난이 아닌 비판을 통해 비평의 의미와 역할이 정치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두려웠을까, 그동안 남명의 사상과 업적은 암울했던 역사의 그늘에서 잠재워져 있었다. 오백 년이 지나 조차산에 묻혀있는 오래된 미래가 한꺼풀씩 벗겨져, 이제야 참 선비의 길이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있음에 가슴이 뿌듯해진다.

 

어린 시절, 필자는 마을로 들어가는 큰 길 옆에서 홍류동 계곡 물줄기를 우두커니 바라다보이는 참 선비 내암 정인홍 선생의 묘소 근처에서 개구쟁이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누구의 무덤인지도 몰랐다. 그 당시의 개구쟁이들이 다 그랬듯이 묘소를 놀이터 삼아 가끔 비료 포대기로 미끄럼타기를 즐기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버르장머리없는 고약한 놈이라고 어른들께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세간의 이목을 받지 못한 내암의 묘소는 관리가 되지 않아, 버려진 무덤으로 알고 있었기에 개구장들의 놀이터가 되어 묏등이 반질거릴 정도였다. 당시에 누군가가 내암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줬더라면 묘소뿐 아니라 선생이 강학을 하던 부음정에도 자주 들러 정성들여 선생의 기를 많이 받고 자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들은 선생의 묏등을 놀이터 삼아 놀았기에 선생의 기를 이미 많이 받아서 필자가 이 정도로 유능(?)한 것이라며 위로를 하며 농담을 아끼지 않는다.

 

남명 선생의 수제자 중 오건, 정구, 정인홍, 김우옹, 최영경이 남명오현(南冥五賢)'으로 불렸는데 그 애제자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내암 정인홍에게 경의검을 물려주었다. 내암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을 거쳐 정유재란 때에는 홀로 의병을 일으키며 실천적 학문의 길을 열어가는 참 선비의 경의로움을 보여주었다. 의병활동을 통해 선조와 광해군의 돈독한 신뢰를 얻은 내암은 인조반정 때 반정의 빌미가 된 폐모살제의 주역으로 몰려 참수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훗날 조선 말 순종 2(1908)에 반역죄가 벗겨지면서 관직도 회복되었지만, 남명이 그렇듯 당시에는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내암의 세월은 낙동강 물 흐르듯 역사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내암 선생의 유년기에 있었던 특출난 일화가 있다. 어린 정인홍은 집 밖에서 어린 참새를 잡아 놀다가 어쩌다 보니 부주의로 아기 참새를 죽이고 말았다. 죽은 아기 참새가 불쌍했던 정인홍은 통곡하다가 집 근처 강가의 버드나무 아래에 참새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그리고 집에 와서 지필묵을 가져다가


새가 죽어 사람이 곡하는 것은

의에는 어긋나는 일인 줄은 아노라

그러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나는 너를 위해 슬피 우노라.” 


라며 참새를 추도하는 제문을 지어 애도하며 통곡을 하였다고 한다이때 지나던 어느 선비가 그 이유를 묻자 어린 정인홍은 참새의 무덤을 만든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선비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참새의 무덤을 만들어 주면서 그토록 슬퍼게 통곡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지은 제문을 보여주었다. 선비는 어린 아이가 쓴 제문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내암 선생의 유년 시절에서 볼 수 있듯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마음도 대단했던 것 같다. 아마 그 당시에 반려동물에 대한 문화가 있었다면 반려인으로도 귀감이 되셨을 것이다.

 

오늘도 밤하늘에 홀로 새초롬히 웅크리고 있는 별을 바라보며, 남명 선생과 내암 선생을 가슴에 품고, 전쟁통 난리 같은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홀로 밤을 지키는 별에게 조용히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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