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선생의 원류를 찾아서/김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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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선생의 원류를 찾아서/김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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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선생의 원류를 찾아서

                                                   김두기


길은 언제나 사람보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2026년 1월 24일, 인제대학교와 함께하는 글로컬 김해학 
인제 한국학 아카데미 과정에서 남명 조식 유적 답사에 들었다. 
김해 산해정에서 선생의 흔적을 밟으며 발길을 따라 합천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남긴 말을 찾아서가 아니라, 
말이 닳아 사라진 자리에서 아직 남아 있는 자세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합천의 산은 다가오지 않았고, 강은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이 땅은 나로 하여금 속도를 낮추고, 고개를 먼저 숙이게 했다. 
역사는 늘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명 조식은 이 고장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곳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삼가의 바람은 어린 학인을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고, 
황강의 물결은 그에게 안온함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 떠났다. 
떠난다는 것은 더 멀리 가기 위함이 아니라, 
더 깊이 서기 위한 준비였다는 것을 이곳에 서서야 알 것 같았다

해설을 하시는 박소희 교수의 목소리는 남명의 생애를 시간 순으로 정리해 주었다. 
관직을 거부한 일, 경(敬)을 학문의 뿌리로 삼은 사상, 
칼을 벽에 기대지 않았던 태도. 말은 분명했고 설명은 친절했다. 
그러나 그 말들이 혀끝에서 미끄러질수록, 내 몸은 자꾸 뒤처지고 있었다. 
이해는 빨랐으나 자세는 늦었다. 
남명은 그런 종류의 이해를 오래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뇌룡정으로 향하는 길은 화려하지 않았다. 
이름과 달리 정자는 낮았고, 주변은 조용했다. 
용이 오르내렸다는 전설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정자가 풍경을 독점하지 않는 태도였다. 뇌룡정은 앞서 나서지 않았다. 
앉으면 자연히 바람이 들어왔고, 고개를 들면 산이 먼저 시야를 채웠다. 

남명은 이런 자리를 좋아했을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세상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는 곳. 
해설자는 남명이 평생 관직을 멀리한 이유를 설명했다. 

부패한 조정, 타협하지 않는 성정, 시대와의 불화. 
모두 맞는 말이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남명은 벼슬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기 몸보다 앞서는 자리를 거부했을 뿐이다. 
그는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상보다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외쳤으나 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분명했으나 칼날처럼 번뜩이지 않았다.

합천을 떠나 산청 덕천으로 향했다. 
지리산 자락이 가까워질수록 말은 줄고, 발걸음의 소리가 커졌다. 
덕천강은 넓지 않았지만 얕지 않았다. 
물은 소리를 키우지 않고 방향만 분명히 했다.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강 앞에서 스스로의 무게를 재는 기분이 들었다. 
남명이 이곳에 덕천서원을 세운 이유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학문은 모이는 일이 아니라,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덕천서원 마루에 올라섰을 때, 발이 먼저 멈췄다. 
낮은 처마 아래에서 자연스레 허리가 굽혀졌다. 
그곳에는 ‘가르침’이 없었다. 
다만 오래 견딘 나무의 결, 수많은 발걸음이 남긴 간격,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공기가 있었다. 
남명은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지만, 
대신 사람의 몸이 스스로 고쳐지기를 기다렸다. 
이곳에서 경(敬)은 글자가 아니라 각도였다.

돌아오는 길은 처음보다 길이 낮아 보였다. 
산은 그대로였고, 강도 변하지 않았지만, 
내 발걸음의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기록을 남기러 왔던 나는, 
어느새 기록 앞에서 멈추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을 적을 것인가보다, 어디에 설 것인가가 더 큰 질문이 되었다.

남명의 원류는 책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산해정의 신선함, 합천의 바람, 뇌룡정의 침묵처럼, 
덕천의 마루, 설명되지 않는 자리에서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 흐름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도 사람의 자세를 묻고 있었다. 
나는 깊이 절을 올렸다. 형식이 아니라, 도망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기행을 마치며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남명을 따른다는 것은 그를 닮는 일이 아니라, 
그가 끝까지 피하지 않았던 현실 앞에 그대로 서는 연습이라는 것을. 
오늘 이후, 말을 덜 쓰고 몸을 더 쓰는 쪽으로 살아야겠다고. 
산과 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래 따라왔다.



남명 조식의 원류를 찾아서/김두기

합천의 아침은 사람보다 먼저 깨어
이름을 부른다

산천재의 문턱에서
돌계단이 나보다 먼저 허리를 굽히고
흙은 오래된 경(敬)을 닦고 있었다

남강은 말하지 않고도 배움의 방향을 알고

세월은 강물에 몸을 씻기며
선비의 그림자를 아직 놓아주지 않는다

덕천서원 마루에 앉으니 바람이 먼저 수업을 열고
침묵이 출석을 부른다

해설자의 말은 과거를 건너오고
나는 그 말에 기대 오늘의 나를 슬쩍 숨기려 했지만

남명의 눈빛은 지금도 돌 위에 앉아
나의 등을 곧게 세운다

절은 허리에서 끝나지 않고 삶의 안쪽까지 내려가
다시 일어서게 한다 

나는 돌아오며 알았다 원류는 장소가 아니라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자세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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