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해 시인의 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2 * 박덕은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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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해 시인의 시집 출간을 축하하며 2 * 박덕은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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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기억을 흔드는 손처럼
하얀 벚꽃을 꽃비로 쓸어내리고
그 한 장 한 장은
짧은 생의 페이지를 넘기듯
숨죽인 채 떨어진다 
 
찰나를 사는 로맨스
봄은 그 짧은 열정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태운다 
 
흰 나비처럼 나락에 내려앉는
이별의 전주곡
꽃잎은 무더기로 쏟아지며
시간의 강을 건넌다 
 
저마다 가는 길 위에서
꽃은
하늘 아래 피어난
눈물의 모양으로
다시 한 번 봄이 된다. 
     - [낙화]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낙화를 관찰하고 있다. 투신이 아름다운 게 있다면 그건 꽃의 낙화일 것이다. 한 잎 한 잎의 유서가 허공에서 환해진다. 유서의 낱글자들이 어떤 향기 같고 어떤 당부 같기도 하다. 가지를 붙들고 속엣말을 꺼내놓은 꽃잎들이 이제는 다시 '찰나를 사는 로맨스'를 써 내려간다. 투신이 저와 같은 로맨스였다니, 멋지다. 새로운 해석이 돋보인다. 그러고 보니 삶의 모든 순간이 찰나를 사는 로맨스였구나 싶다. '봄은 그 짧은 열정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태운'다며 시적 화자는 우리에게 어떤 뜨거운 화두를 던진 듯하다. 우리는 저 봄처럼, 찰나를 사는 로맨스처럼 뜨겁게 타오른 적이 있었는가. 꽃이 피는 게 봄인데 화자는 꽃이 지는 것도 다시 한 번 봄이라고 말한다. 관점을 달리하면 얼마든지 우리는 편안하게 삶을 바라볼 수 있다. 성공을 향한 오름만이 꼭 행복은 아니다. 흰 나비처럼 내려앉는 내려섬도 행복이다.
 바람은 벚꽃을 꽃비로 쓸어내린다. 벚꽃은 숨죽인 채 떨어진다. 봄은 스스로를 불태운다. 길 위에서 낙화는 눈물의 모양으로 다시 한 번 봄이 된다. 낙화의 이미지를 돕는 시적 형상화가 멋스럽다. 기억을 흔드는 손 같은 바람, 짧은 생의 페이지를 넘기듯 지는 꽃잎, 나락에 내려앉는 이별의 전주곡, 시간의 강을 건너는 꽃잎, 다시 한 번 봄이 되는 눈물의 모양 등의 표현이 상큼하다. 이렇듯 사물을 새롭게 해석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높이고 있다. 
 
계절은 옷을 버리고
새길을 가자는데
아직은 벽을 붙들고
남아 있고 싶어라
하늘 끝
닿고 싶은 욕망
너에게만 있으랴 
 
여름날 물오른 잎새
하나둘 떨궈내고
풀벌레는 제철이라고
합창소리 높아질 즈음
성근
잎새 사이로
완성하는 가을 벽화. 
    - [담쟁이]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담쟁이의 일대기를 관찰하고 있다. 생을 곧추세우는 등뼈도 없으면서 담쟁이는 잘도 오른다. 온몸이 손과 발인 초록들이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며 의지를 불태운다. 뿌리의 신념이 단단해서일까. 흐물흐물 주저앉을 법도 한데 오르고 또 오르는 저 초록의 진격. 담쟁이는 그들의 예법대로 벽을 움켜쥐며 오른다. 절대 수직 상승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의 어깨를 겯고 한계를 넘어서며 안간힘으로 자신의 단점을 뛰어넘는다. 그런 담쟁이에게 가을은 절정이다. 풀벌레 소리가 제철인 가을에 귀맛이 좋은 소리들을 받아먹으며 가을 벽화를 완성한다. 잎잎의 표정들이 모두 환하겠다. 계절은 자신의 옷을 벗는데 담쟁이는 더 치열하게 더 뜨겁게 공명하며 그들만의 생을 완성한 것이다. 
 여름날 물오른 잎새, 옷을 버리고 새길 가는 계절, 여전히 벽을 붙들고 있는 담쟁이의 모습, 하늘 끝 닿고 싶은 욕망을 안고 있는 모습, 풀벌레 합창 소리 높아질 때, 비로소 성근 잎새 사이로 완성하는 가을 벽화. 이 모든 게 담쟁이넝쿨이다. 담쟁이넝쿨이 이뤄놓은 가을 벽화, 그 앞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쩌면, 자연처럼 우리 인간도 생을 마무리할 땐 담쟁이넝쿨처럼 하나의 예술작품을 완성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문득 시비를 세우고 가는 시인들이 떠오른다. 호랑이의 가죽처럼, 담쟁이의 가을 벽화처럼,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비처럼, 뭔가 이 땅에 완성된 작품,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을 한 점 남기고 가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자체가 완성된 예술작품이기를 바라는 그런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하다. 
 
아무도 몰래 아주 작은 숨결로 봄이 다가온다 
 
아직 겨울의 잔잔한 기운이 창문 틈에 남아 있지만
어느새 바람이 조금 다정해졌다 
목 끝에 닿는 공기가 어제보다 부드럽고 
별이 마음 한 구석을 슬쩍 쓰다듬고 간다 
거리의 나무들은 여전히 앙상하지만 
가지 끝에 달린 작은 꽃눈들이 조용히 말을 건다 
 
"곧이야 조금만 더" 
 
아침을 여는 빛이 달라졌다는 걸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해가 뜨는 속도가 살짝 빨라졌고 
바닥에 내려앉은 그림자의 온도도 더 따뜻해졌고 
그 변화는 아주 조심스럽고 느리고 또 아름답다 
 
마치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하다가 
어느 날 문득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런 변화 
세탁줄에 걸린 겨울 옷들이 하나 둘 옷장에서 사라지고 
유리창 너머로 고양이 한 마리가 졸린 눈으로 햇살을 쬔다 
 
아이들은 모래밭에 쪼그리고 앉아 
이름 모를 풀을 만지작거리고 
동네 어귀 개나리 덤불은 아직도 피지 않았지만 
곧 노랗게 터질 준비를 한다
세상이 조금씩 살아나는 이 조용한 소란을  
우리는"봄"이라 부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발라드가 유난히 따뜻하게 들리는 날 
향긋한 커피 한 모금이 평소보다 부드럽게 느껴지는 날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싶은 그런 순간 
그 모든 감정 뒤에는 봄이 있다
들리지 않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소리 
 
바로 봄이 오는 소리 
 
어쩌면 봄은 계절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인지 모른다 
누군가를 다시 그리워 하고
나를 조금 더 사랑하고 싶어지는 그런 순간
그럴 땐 꼭 눈을 감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본다
지금 봄이 너에게로 가고 있는 중이니까.
   - [봄이 오는 소리]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봄이 오는 소리를 시적 형상화해 놓고 있다. 봄을 '세상이 조금씩 살아나는 조용한 소란'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멋진 해석이다. 그래서 봄이 오면 우리의 귓속이 그리 소란스러웠나 보다. 마음을 귀울여야 들리는 소란이 봄을 아름답게 한다. 우리의 귀는 편식이 심해 봄의 소란을 좋아한다. 꽃빛으로 말을 걸어오고 향기가 귀바퀴에 쌓이는 그 봄이 아름답다. 꽃망울이 터지는 그 소리에 세상의 모든 소리는 짓눌린다. 입꼬리가 올라간 개나리가 제 그리움을 켜 노랗게 환해지고, 그 노란 속엣말들을 우리는 귀로 듣는다. 또 시적 화자는 '봄은 계절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맞다. 봄은 마음의 상태다. 새로운 해석이 빛을 발하고 있다. 시는 이처럼 새로운 해석, 새로운 관점이 있어야 한다. 화자는 '누군가를 다시 그리워 하고/ 나를 조금 더 사랑하고 싶어지는 그런 순간/ 그럴 땐 꼭 눈을 감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생의 봄날이 오고 있는 것이다. 기다림으로 벙그는 봄날이 웅크린 잠 속에서 깨어나 다시 만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발랄한 감성이 움찔움찔 살아나고 갓 태어난 여린 그리움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순진무구한 그 봄의 눈망울들을 맞이하러 가자. 우리의 봄날을 다시 꽃피우자.
 작은 꽃눈들이 조용히 말을 건다. 세탁줄에 걸린 겨울 옷들이 옷장에서 사라진다. 고양이는 졸린 눈으로 햇살을 쬔다. 아이들은 모래밭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만지막거리고, 동네 어귀 개나리는 꽃망울 터뜨릴 준비를 한다. 라디오에선 발라드가 따뜻하게 흘러나오고, 향긋한 커피 한 모금은 유달리 부드럽다. 마음으로 느껴지는 소리, 마음속에 들려오는 소리, 그 봄의 소리에 귀기울인다. 이 소리, 이 조용한 소란을 봄이라 부른다. 봄이 오는 소리에 집중하면서, 생생한 이미지 구현을 해놓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처럼, 이승해 시인의 시들은 시의 특질을 바탕에 깔고, 이미지 구현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 독자의 눈길을 끈다. 
 시는 찰나의 예술이다. 길고 긴 인생살이보다는 어느 한 순간의 감성을 이미지로 포착해 내어 독자의 가슴에 파고드는 문학 장르이다. 따라서 시는 보다 선명한 이미지로 그림을 그릴수록 더 좋다. 다채로운 감성 중 하나를 발굴하여 독자 앞에 내놓고, 이왕이면 신선하게 새로운 해석, 즉 낯설게 하기를 해놓을수록 싱그럽고 완성도가 높아진다. 그 기반이 치열한 현실인식일수록 감명도가 높아진다. 주제를 노출하지 않고, 가급적 에둘러 표현하여, 감동의 전율을 등줄기에 흐르게 하는 기법이 함께하면 더 좋다. 
 이승해 시인이 여생 동안 꾸준히 시의 특질을 기반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발표하여, 꾸준히 시집을 펴내고, 이따금 시선집도 챙겨가기를 바란다. 창조하는 삶이 가장 아름답다는 인생관을 가지고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꾸려가기를 소망한다.

    - 사방천지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들에 취해
      한실문예창작 지도 교수 박덕은
      (문학박사, 전 전남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시인, 대한민국시문학회 회장, 박덕은 미술관 관장, 화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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