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신흥부전 / 위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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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신흥부전 / 위점숙

언어풍차 0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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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점숙 작가



일어나보니 곤두박질쳤던 수은주가 제법 올랐다. 

어제보다 무려 9도나 차이가 난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중랑천으로 향했다. 

나에게는 매일 거르지 않는 세 가지 루틴이 있다. 

책에서 좋은 문장을 발췌해 읽고 질문에 답을 쓰는 ‘따스한 문장 쓰기’, 

시집 한 권을 정해 하루에 한 편씩 필사하는 시간, 

그리고 마지막이 중랑천을 산책하는 것이다. 


앞의 두 루틴은 온라인을 통해 전국의 인연들과 나누는 마음의 양식이라면, 

산책은 아무 생각 없이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온전한 비움의 시간이다.

조금 풀린 날씨 덕분인지 물속을 유영하는 오리 가족과 큰 잉어 떼가 나를 반긴다. 

홀로 걷는 산책길에 이들은 더할 나위 없는 벗이다. 

또 하나의 즐거운 벗이 있다면 비둘기들이다. 

날씨가 따뜻한 날이면 오종종 모여 모래 목욕을 하거나 

널브러져 자는 모습은 귀엽다 못해 웃음이 나온다.
서둘러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무리 날이 풀렸다 해도 여전히 겨울이다. 

서로의 온기를 보태며 보금자리에 모여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비둘기가 있어야 할 자리엔 뜻밖에도 

기다란 작대기를 휘두르며 어떤 아저씨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똥이나 찍찍 갈기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들!"
그 위로 불안한 비둘기들이 어지러이 날고 있었다. 

아저씨는 대낮부터 만취 상태였다. 

지나가던 어르신이 "술을 먹으려면 곱게 먹을 것이지, 한두 번도 아니고"라며 혀를 찼다. 

그 험악한 풍경을 보니 며칠 전 망우역에서 있었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요즘 공원 곳곳에는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자생력을 잃고 사람에게 의존하는 ‘닭둘기’와 개체 수 조절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망우역 앞에서 한 남자가 비둘기들에게 새우깡을 던져주고 있었다. 

처음엔 무책임한 행동이라 생각하며 유심히 지켜보는데, 그의 거동이 수상했다. 

먹이를 주는 게 아니라 새를 유인해 잡으려는 듯 보였다.
약속도 잊은 채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내 짐작이 적중했다. 

드디어 몸이 둔한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손에 잡혔다. 

그런데 그가 주머니에서 뾰족한 칼날 같은 것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아차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광경은 내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아저씨는 비둘기 다리에 칭칭 감긴 낚싯줄을 풀고 있었다. 

칼에 서툰 손에서는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절뚝거리는 게 안쓰러워 풀어주려 했는데, 이제야 잡았네요." 

그는 나를 보며 씩 웃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드디어 실이 풀렸다. 

겁에 질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비둘기는 손에서 풀려나자 

잠시 홀린 듯 서 있다가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전래동화 '흥부전’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읽었던 흥부전 속 흥부는 부러진 제비 다리를 정성껏 고쳐주고 박씨를 얻었다. 

우리는 흔히 그 보상인 ‘금은보화’에만 집중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 내가 만난 망우역의 아저씨는 보물을 바라고 칼을 든 것이 아니었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친절은 때로 오해를 산다. 

나조차도 그의 칼날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듯, 세상은 종종 다정함을 수상하게 여긴다.


중랑천에서 작대기를 휘두르던 아저씨와 망우역에서 피를 흘리며 실을 풀던 아저씨. 

두 모습 사이에서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현대판 흥부’의 마음을 본다. 

비둘기를 쫓아내야 할 해조(害鳥)로만 보느냐, 

아니면 함께 살아가며 보듬어야 할 생명으로 보느냐의 차이는 

결국 내 마음의 온도가 결정하는 것이었다.

비둘기가 그어 놓은 하늘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겨본다. 

박을 타듯 정성스레 실을 풀던 아저씨의 거친 손마디가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면서도 팽팽하게 차오른다. 


내일의 산책길에선 비둘기들의 오종종한 걸음걸이가 조금 더 가벼워져 있을까. 

수은주는 이제 막 영상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 계절은 이미 저만치 앞서 봄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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